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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학

대프니 듀 모리에의 ≪나의 사촌 레이첼≫ - 사랑에 빠진 인간

by 손끝 2021. 2. 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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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의 사촌 레이첼≫ (대프니 듀 모리에, 변용란 옮김, 2017)

 

 

대프니 듀 모리에(Daphne du Maurier)는 1907년 부모님이 모두 배우였던 영국 가정에서 태어났다. 1938년 발표한 ≪레베카≫는 그녀의 대표작이 되었고 그녀는 서스펜스의 여왕으로 불렸다. "1951년, 작가의 나이 44세에 발표한 ≪나의 사촌 레이첼≫은 이미 많은 작품으로 대성공을 거두었던 그녀의 마지막 베스트셀러다."(p.568) 1969년 영국에서 작위를 받았고, 1977년 미국 미스터리작가협회로부터 그랜드 마스터 상을 받았다. 


 필립은 생후 18개월 무렵 부모를 잃고 독신인 숙부 앰브로즈와 함께 여자가 없는 집안에서 자란다. 이탈리아로 여행을 떠난 앰브로즈는 그곳에서 필립의 먼 친척뻘인 레이첼을 만나 그녀와 결혼하고 이 사실을 필립에게 편지로 알린다. 필립은 레이첼에 질투심을 느끼고 그들이 돌아오면 자기가 이 집을 나가야 할 수 도 있다는 사실을 깨닫는다. 평소와 다르게 어지러운 글씨체로 휘갈겨 쓴 앰브로즈의 편지를 받고 필립은 레이첼을 의심하며 그의 대부 닉 켄들에게 찾아간다. 그로부터 앰브로즈의 아버지가 뇌종양으로 사망했으며 이 병이 유전일지도 모른다는 대부의 의견을 듣는다. 필립은 바로 이탈리아로 떠나지만 그가 도착했을 때 앰브로즈는 이미 사망했고 미망인 레이첼은 앰브로즈의 모든 물건을 갖고 집을 떠난 후였다. 필립은 그 자리에서 레이첼에게 복수를 다짐한다. 

 영국 집으로 돌아온 필립은 앰브로즈의 사망 소식이 자기보다 먼저 도착한 사실을 발견한다. 필립은 앰브로즈의 죽음에 레이첼을 의심하지만 앰브로즈의 죽음으로 레이첼이 아무것도 요구하지 않았다는 이유로 대부는 필립의 의견에 동의하지 않는다. 며칠 후 레이첼이 앰브로즈의 유품을 가지고 영국에 도착한다. 필립은 레이첼에게 모욕을 줄 요량으로 그녀를 집에 초대한다. 필립을 처음 본 레이첼은 앰브로즈와 너무도 닮은 모습에 놀라고 레이첼을 직접 본 필립은 자신의 상상과는 다른 그녀의 모습에 놀란다. 필립은 레이첼에게 가졌던 오해를 풀고 둘은 편안한 시간을 보낸다. 앰브로즈의 유품을 함께 정리하던 중 필립은 바른 글씨체로 쓰인 앰브로즈의 편지 조각을 발견한다. 레이첼이 낭비벽이 있으며 더는 자신의 지갑에 손을 못 대게 해야 한다는 내용이었다. 레이첼이 편지의 내용을 묻자 그는 황급히 그 조각을 불에 태운다. 그 후 필립은 앰브로즈의 다른 유품에서 온전한 상태의 편지를 확인한다. 앰브로즈 죽음에 대한 레이첼의 유죄를 합리적으로 의심할 수 있는 단서가 되는 편지지만 필립은 이 편지를 땅에 묻는다. 후견인 없이 스스로 모든 것을 결정할 수 있게 되는 25살 생일에 맞춰 필립은 자신의 모든 재산을 레이첼에게 준다고 공증한 서류를 전달한다. 필립은 레이첼에게 공개적으로 청혼하지만 거절당하고 병에 걸려 의식을 잃었다가 5주 만에 깨어난다. 자신의 증상이 앰브로즈의 편지 속 증상과 유사하다고 생각한 필립은 다시 레이첼을 의심하고 그녀가 자기를 떠날 것이라는 것을 알자 레이첼의 위험을 알면서도 그녀의 죽음을 방조한다. 죽기 전 레이첼은 필립을 바라보며 앰브로즈라고 부른다. 

 


  그래서 레이첼은 앰브로즈를 독살했다는 건가? 앰브로즈를 정말 사랑했을까? 영국에는 왜 왔을까? 다 읽고 나서도 의문점들이 하나도 해결되지 않았다. 독서토론 선정도서였는데 모임에서 미스터리 분야는 처음이라 다른 분들은 책을 어떻게 읽었는지 궁금했다. 이 책은 처음부터 끝까지 필립의 시선으로 서술된다. 레이첼을 만나기 전까지 자신의 숙부와 그 저택과 영지가 인생의 전부였던 청년 필립, 그의 직업은 '상속자'였다.  나는 처음부터 미숙하고 독단적인 청년 필립이 마음에 들지 않아 비판적인 태도로 책을 읽었고 필립을 깊이 이해하기 어려웠다. 

 

 레이첼은 악인인가? 나는 그렇게 생각하지 않았다. 그녀는 원예에 조예가 깊었고 허브식물을 약으로 잘 사용할 줄 알았다. 앰브로즈와 필립의 증상이 비슷한 것은 독살 의도가 아니라 그녀가 환자를 위해 만든 허브차의 부작용이라고 생각된다. 앰브로즈와 필립은 둘 다 레이첼의 이탈리아 친구 레이날디와 그녀의 관계를 의심한다. "그는 내 잘못과 결점을 다 알고도 나를 경멸하지 않고, 있는 그대로의 나를 받아들여줬어요."(p.517)라는 레이첼의 말에서 이전에 자기를 평가하고 비난한 사람들로부터 상처 받은 경험이 있음을 추측할 수 있다. 방랑벽이 있고 경제관념이 없었던 부모에게서 자란 레이첼은 충동적이고 낭비벽이 있다고 평가받았지만 그녀의 입장에서는 사치가 아니라 아름다운 물건을 보는 안목이 있었던 것일 뿐이다. 

 

 앰브로즈의 재산을 노려 의도적으로 결혼하고 독살했을까?라는 의견에도 나는 동의하지 않았다. 레이첼과 앰브로즈는 서로 사랑했지만 살아온 배경의 문화적 차이가 있어 오해가 있었던 걸로 추측된다. 필립과 레이첼 사이에 있었던 일을 서로 다르게 해석하는 것을 보면 앰브로즈도 필립과 비슷한 경험을 했던 것 같다. 

p.452

 레이날디의 편지 중 "결국 도저히 그 청년을 버리고 떠날 수 없을 것 같으면 함께 데려와요."(p.561)라는 대목에서 레이첼이 앰브로즈를 닮은 필립을 두고 피렌체로 떠나지 못하는 걸 알 수 있다. 레이첼이 죽기 전 필립을 보고 앰브로즈라고 부르는 장면에서 나는 레이첼이 앰브로즈를 사랑했다고 확신했다. 그러나 이 장면을 보고 앰브로즈를 독살했기 때문에 마음의 가책을 느껴서였다라는 의견도 있었다.

 

 필립이 앰브로즈의 메모를 불 속에 던지고 편지를 땅에 묻고 나중에는 찢어버리는 장면에서 나는 필립이 매우 비합리적인 인물이라 생각했고 그의 행동을 납득하기 어려웠다. 앰브로즈를 사랑했을 때는 뇌종양으로 인한 사망 가능성을 받아들이지 않고 대부의 의견에 반해 레이첼을 의심하고 레이첼을 사랑할 때는 레이첼을 의심할 만한 단서를 발견하고도 앰브로즈의 독살 가능성을 모른척한다. 그러나 독서 모임의 상당수 회원분들은 이 장면을 '필립의 사랑이다.'라고 했다. 어리고 순수한 시절 맹목적이고 눈먼 사랑. 레이첼을 의심했던 자신의 마음을 들켜버릴까 봐 앰브로즈의 메모를 황급히 불에 태워버리지만 결국 불신의 씨앗으로 남아 그녀를 믿지 못하고 파국으로 끝이 난다. 20대 나이에 겪을 수 있는 폭풍 같은 사랑을 지나 나중에 돌아봤을 때 이것이 사랑이 아니고 집착이었음을 깨달은 다음 더 성숙한 사랑을 할 수 있겠지만 레이첼의 죽음으로 끝난 소설에서 필립은 아마 그다음 사랑은 알지 못할 것 같다.

 

 레이첼의 이탈리아 친구 레이날디는 차갑고 이성적인 인물이다. 나는 그가 말한 '오만함과 순진함'이 필립을 대표하는 단어라고 생각했다. "이 곳 영지에만 매달려 있는 저 친구를 떼어내 우리나라를 보여줘요. 여행을 하면 마음이 넓어지잖소."(p.387) 필립을 어리고 오만하고 편협한 인물로 본 그의 의견에 나도 매우 동의했다. 

 

 토론이 끝난 후 내가 필립의 관점에서 소설을 읽지 않았기 때문에 이 소설을 충분히 즐기지 못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가장 사랑했던 앰브로즈를 잃고 그 죽음에 책임이 있을 거라는 의심을 품고 복수를 다짐했던 여성이지만 정작 만나보니 그녀는 작고 아름답고 매력적인 사람이었다. 그녀와 함께한 행복한 순간 중에 다시 그녀를 의심할만한 앰브로즈의 편지를 발견하지만 "내가 무슨 자격으로 과거를 파헤치고, 끝내 내게 당도하지 못한 편지에 관해 궁금해한단 말인가?"(p.276)라며 묻어둔다. 그녀가 숙부 앰브로즈의 미망인이고 아직 상복을 입고 있다는 것도 개의치 않고 청혼하고 같이 살고 싶어 하지만 거절당하자 분노한다. 그녀가 자기를 떠나려 한다는 것을 알고 그녀의 오랜 친구 레이날디를 질투하고 의심한다. 사랑에 빠졌을 때 판단이 흐려지고 나약해지고 상대를 곁에 두고 싶어 집착하지만 좌절당하자 분노하고 마지막에 결국 의심을 거두지 못하는 필립은 우리가 미성숙한 시절 처음 했던 사랑을 대표한다. 토론 전 레이첼이 가엽다고 생각했는데, 토론 후에는 필립에게 마음이 많이 갔다. 필립이 더 성장하지 않고 여기서 소설이 끝난 이유는 그가 우리의 과거이기 때문인듯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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