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도를 기다리며≫(사뮈엘 베케트, 오증자 옮김, 2000)

사뮈엘 베케트(Samuel Beckett)는 1906년 아일랜드 신교도 가정에서 태어나 대학에서 프랑스 문학을 전공했다. 1937년 파리에 정착하고 2차 세계 대전 중에는 레지스탕스에 가입 활동하였다. 전쟁이 끝난 후 다수의 작품을 집필하였고 '영어와 프랑스어로 번갈아 가며'(p.159) 작품을 썼다. 2막으로 이루어진 희곡 ≪고도를 기다리며≫는 '처음에는 프랑스어로 쓰고 뒤이어 영어로 다시 쓴다.'(p.160)
에스트라공과 블라디미르 두 남자가 고도를 기다린다. 그들은 고도가 누군지도 모르고 언제 오는지도 모른다. 1막에서 포조와 럭키가 등장한다. 포조는 럭키의 목에 맨 끈으로 러키를 몰고 들어온다. 럭키는 무거운 짐을 들고 있고 포조는 채찍을 들고 있다. 에스트라공은 포조에게 당신이 고도냐고 묻지만 포조는 아니라고 한다. 포조와 럭키의 퇴장 후 소년이 등장한다. 소년은 "고도 씨가 오늘 밤엔 못 오고 내일은 꼭 오겠다고 전하랬어요."라고 말하고 떠난다. 2막에서 포조는 눈이 멀고 럭키는 벙어리가 되어 다시 등장한다. 에스트라공과 블라디미르는 여전히 고도를 기다린다. 소년은 다시 고도가 내일은 올 거라는 말을 전하고 퇴장한다.
백 명이 읽으면 백가지 해석이 나온다고 한다. 참여했던 독서모임에서도 그랬다. 각자 자기의 입장대로 소설을 읽다 보니 등장인물과 고도의 의미가 무엇인지에 대해 각자 새로운 소설을 쓰고 있었다. 그 점이 상당히 재밌었다.
고도는 누구인가? 고도를 기다리는 블라디미르와 에스트라공은 누구인가? 포조와 럭키는 왜? 소년은 왜 등장하는가? 이 희곡이 쓰인 시기가 2차 세계대전 후 1952년인 것을 단서로 나도 나만의 소설을 써봤다.
고도는 신을 대체할 존재라고 생각했다. 기존의 기독교적 신(가치관)과 함께 삶의 기준, 목적, 소명을 잃은 방황하는 인간들이 블라디미르와 에스트라공이다. 그들은 이제 과거의 신 외에 다른 의지할 존재를 기다리고 있다. 1막 첫 장면에서 에스트라공은 구두를 벗으려고 애쓴다.(p.9) 포조가 먹고 버린 뼈다귀를 주워 먹고(p.41) 쓰러진 포조가 도와달라고 돈을 주겠다고 하자 흥정한다.(p.135) 매번 '가자'고 먼저 말하고 블라디미르가 안된다고 하면 곧 쉽게 수긍한다. 아이 같기도 하고 원초적 욕망에 솔직하다.
에스트라공 가자.
블라디미르 가면 안 되지.
에스트라공 왜?
블라디미르 고도를 기다려야지.
에스트라공 참 그렇지.
반면 블라디미르는 모자를 자주 만지고(p.13) 에스트라공을 보면 안아주려 하고(p.10) 에스트라공에게 자장가를 불러주고 자신의 옷을 벗어 덮어준다.(p.118) 2막에서 포조와 럭키를 다시 만나지만 에스트라공은 어제의 일을 기억하지 못한다. 포조도 기억을 못 하고 블라디미르만이 '시간'개념이 있다. 1막 초반 블라디미르가 말한 성서 이야기를 떠올려 보면 블라디미르가 옳은 것인지, 나머지 세명이 옳은 것이지 알 수 없다. 같은 상황을 네 명이 보았는데 그중 한 복음서에서만 구원받은 도둑 이야기가 나온다는 것이다. 나머지 세 명은 구원 이야기를 하지 않는데도 사람들은 한 복음서의 이야기만 진실로 알고 있다고 한다.

에스트라공과 블라디미르는 고도가 오지 않을 것을 어렴풋이 알고 있다. 죽은 신 이후에 새로운 신은 오지 않는다. 애초에 그런 건 존재하지 않았다. 삶의 기준, 목적이 없어진 인간인 두 사람은 자살하려 하지만 그러지 못한다. 2막 마지막 블라디미르는 "내일 목이나 매자."라고 말하면서 내일 고도가 온다면 "그럼 살게 되는 거지."(p.158)라고 말한다. 새로운 신(가치관)이 없는 세상에선 살 이유도 목적도 없으니 죽어버리겠다고 한다. 결국 그들이 기다리는 신은 영원히 오지 않고 그들은 자살하지도 않고 헤어지지도 않고 둘만 남는다. 신 없이 인간들만 남는다.
포조는 럭키 목에 줄을 매고 짐꾼으로 부리며 채찍으로 매질한다. 포조의 이름은 고도와 모음이 같다. 나는 포조와 럭키가 현실 세계를 보여준다고 생각했다. 항상 지배계층과 피지배계층은 존재했다. 그 수단이 출생의 신분에서 자본으로 바뀌었을 뿐. 포조는 "하긴 운명의 장난이 없었기에 망정이지 저놈과 내 처지가 바뀌지 말란 법도 없지. 다 팔자소관이라오"(p.49)라고 말한다. 지배층은 지배층으로 태어나고 피지배층은 피지배층으로 태어난다.

2막에서 포조는 장님이 되고 럭키는 벙어리가 되어 나타난다. 어느 날 그렇게 된다. 잘하고 잘못해서 그렇게 되는 것이 아니다. 절대 선도 없고 인과 관계도 명확하지 않다. 누가 옳고 누가 그른가, 무엇이 좋고 무엇이 나쁜가 알 수 없다. 넷 중 블라디미르만이 의식이 깨어있는가 아니면 블라디미르의 착각이고 나머지 셋의 이야기가 진실인가 알 수 없다. 나는 이 '알 수 없다.'가 주제라고 생각했다. 그렇다면 소년은?
소년은 새로운 신이 제발 존재하기를 바라는 블라디미르와 에스트라공의 믿음이 만든 허상이거나 구시대의 유물들이 앞으로 신 없이 인간들만 남아 새롭게 쓰게 될 가치관을 막는 장치로 보았다. 블라디미르와 에스트라공이 마침내 자기들에게 올 새로운 신이 없음을 받아들이지 못하게끔 계속 발목을 잡는 역할이라고 생각했다.
내가 써 본 소설이다. 감옥에서 공연되었을 때 이를 본 수감자들은 고도를 자유라고 말했다고 한다. 결국 평소 나의 욕망과 가치관이 고도에 반영되므로 고도를 통해 내 마음을 확인할 수도 있다. 이 책은 읽고 난 뒤 스스로 이야기를 다시 꾸며야 한다.
Do It Yourself. 아주 매력적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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